고난당한 자들에게 위로자가 되라
Be a sharer of comfort to them who are in any trouble.
God of all comfort; Who comfort us in all our tribulation.
2009년 10월 11일 11시 교회
Written by John T. Lee
고후 1:1-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nd Timothy our brother, To the church of God in Corinth, together with all the saints throughout Achaia: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compassion and the God of all comfort, who comforts us in all our troubles, so that we can comfort those in any trouble with the comfort we ourselves have received from God. For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flow over into our lives, so also through Christ our comfort overflows. If we are distress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if we are comfort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produces in you patient endurance of the same sufferings we suffer. And our hope for you is firm, because we know that just as you share in our sufferings, so also you share in our comfort.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e hardships we suffered in the province of Asia.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He has delivered us from such a deadly peril, and he will deliver us. on him we have set our hope that he will continue to deliver us, as you help us by your prayers. Then many will give thanks on our behalf for the gracious favor granted us in answer to the prayers of many.
예화 1 미인대칭(微人對稱)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재미있는 과제를 냈다. 똑 같은 꽃나무를 화분 두 개에 나눠 심은 다음, 각각 이름을 지어 주라고 했다. 다만, 한쪽은 아주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다른 한쪽은 형편없는 이름을 지어준 뒤, 물을 줄 때마다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들은 이 재미있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무척 흥미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똑같이 물을 주었는데도 ‘예쁜아, 예쁜아’하고 사랑스럽게 불러주며 기른 꽃나무는 보기에도 윤이 나고 튼튼하게 자랐다. 그런데 ‘멍청아, 멍청아’하면서 기른 꽃나무는 눈에 띄게 초라해졌다.
말 못하는 식물도 이처럼 자신을 향한 사랑을 그대로 느낀다. 예쁜 이름을 부르는 동안 주인의 마음 속에는 꽃나무를 향한 애정이 절로 샘솟았을 것이다. 이름 자체에 이미 정이 듬뿍 배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멍청이라는 어감이 뿜어내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식물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인간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유난히 칭찬에 인색한 민족이다. 어릴 때부터 겸손하고 진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운 탓인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것도 서툴다. 칭찬과 격려는 동기 부여를 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 사회에는 조금 두각을 나타낸다 싶으면 은근히 끌어내리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다 좋은데 사생활이 문란해서 안되고,
저 사람은 젊은 시절에는 좋았는데 나중에 정치에 몸담았다가 이미지를 실추시켰기 때문에 안된다고 하는 식이다. 커다란 장점과 작은 단점이 있으면 단점부터 지적하고 훈계하는 이 체질적으로 몸에 밴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문화가 만연하다 보면 자연히 몸을 사리게 되고, 의욕을 잃게 된다. 기업 문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잘한 일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해주는 경우보다는 사소한 잘못이라도 호되게 꾸짖는 경우를 더 자주 접해왔다. 아니, 잘하면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에 더 가깝다. 그러니 전체적인 조직 분위기가 딱딱하게 경직되고, 서로 냉담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꽃나무보다 천 배는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누구든 이왕이면 예쁜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한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또 한 번쯤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다. 작은 격려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를 돌이켜 보라. 우리 모두 실수는 티 안 나게 다독여주고, 칭찬은 부풀려도 좋으니 마음껏 표현하는 문화를 만들어 보자. - 한근태 著 '나를 위한 룰을 만들어라' 중에서-
자식이나 부하 사원, 부부나 비즈니스 파트너 등 상대가 누구든 간에 상대의 좋은 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칭찬해 주는 것, 그것은 그 어떤 질책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미운 상대라도 일단 칭찬부터 하고 나면 우리들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한결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동기 부여시킴은 물론, 그 말을 한 당신까지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 것이다. 칭찬은 행복하면서도 활력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진정한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오늘부터 매일매일 순간마다 미인대칭(微人對稱)의 삶을 살아 가자. '미인대칭!‘ "미소 짓고 인사하고 대화하고 칭찬하기"
예화 2 다시 찾은 삶의 목표
공동묘지 관리인에게 수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편지와 우편환이 동봉되어 왔다. 죽은 자기 아들의 무덤에 신선한 꽃다발을 갖다 놓아 달라는 한 여인의 부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색이 완연한 늙은 부인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직접 아들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아 주려고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제가 앞으로 몇 주밖에 더 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관리인은 말없이 그 여인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부인, 저는 꽃을 사라고 보내주신 부인의 돈을 받을 때마다 유감으로 생각했습니다.”
“유감이라니요?”
“유감이지요.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꽃을 보거나 향내를 맡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병원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꽃을 볼 수도 있고, 향내를 맡을 수도 있지만 이 무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인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 되돌아갔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부인이 다시 찾아왔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나는 직접 꽃다발을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몹시 기뻐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기뻐졌습니다. 의사는 어떻게 내가 다시 건강해졌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삶의 목표를 다시 찾았습니다.”
- 「집에 가서 웃는 사람」/ 김동문
예화 3 내 영혼 평안해
미국 시카고에 아주 행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스패포드(Spafford). 그는 유명한 변호사이며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네 딸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아내와 네 딸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객선 하브호가 영국배와 충돌해 승객 2백26명이 익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겨우 생명을 구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사고현장에 도착해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습니다. 아내는 절망적인 슬픔 속에서도 남편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딸들은 지금 천국에 있어요. 우리와 잠시 헤어져 있을 뿐이랍니다." 스패포드는 이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비극의 바다에서 시 한편을 지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늘 잔잔한 강같든지/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예화 4 시인 김재진의 ‘너를 만나고 싶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중략)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어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예화 5 아브라함 링컨
아브라함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투에서 희생된 병사를 생각하며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종종 부상당한 병사들이 있는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군의관이 심한 부상을 입고 죽기 직전에 있는 한 젊은 병사에게 링컨을 안내했습니다. 링컨은 병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소?”
그랬더니 병사는 그가 대통령인 줄도 모르고 신음하면서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께 편지 한 통만 써주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젊은 병사 옆에 앉아 불러보라고 말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제 의무를 다하던 중에 그만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못할 것 같군요.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저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존과 메리에게도 저 대신 입 맞춰 주시고요.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축복해 주시길 빌겠습니다.”
링컨은 편지 말미에 다음과 같이 서명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 링컨이 이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병사는 편지를 자기에게 보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읽다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대통령인가요?”
링컨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대통령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소?”
그러자 병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을 잡아 주시오. 그러면 평안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는 병사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맺혔고, 링컨의 눈에도 안타까움과 비통함의 눈물이 보였습니다. 대통령이 고통 받는 병사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화 6 어느 병상에서의 고백
병상에 누워 고통과 슬픔을 경험했던 어떤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슬픔에 겨워 앉아 있었다. 누군가 와서 하나님이 나를 다루심에 대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그리고 무덤을 넘어선 소망에 대해 내게 말했다. 그는 쉬지 않고 말했고 틀리지 않는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말에 감동을 받지 않았다. 단지 그가 빨리 가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마침내 그는 갔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내 옆에 앉았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한 시간이나 그 이상을 내 옆에 앉아 내가 무언가를 말했을 때 들어주었고 간단히 대답했으며 단순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떠났다. 내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나는 사실 그가 떠나가는 것이 싫었다.”
I. 들어가며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 간다. 20년 이상 일본 최고의 소설로 각광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1987년 문학사상사 간행)' 속에는 우울증과 자폐증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와타나베라고 하는 스무 살이 안 된 청년 대학생을 통해 사회와 욕망, 사랑에 대한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사회적 약자와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와 고통을 분담하려고 하는 섬세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그의 관심은 상대방과 심리적 공감대를 쉽게 형성하고 무절제한 육체적 욕망을 해소할 관계로 이어간다. 진정한 생명 나눔의 사랑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감각하고 무절제했던 것이다. 상대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도리어 어지럽히고 마는 그런 가면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에 물들고 만 것이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와타나베 청년처럼 사랑과 위로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고 있으며,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처럼 그리스도인 모두를 멸절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지 모른다. 사랑의 사도요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우리 또한 이 시대와 이 세대의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과 위로로 치장하고 도리어 허무와 절망 만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는가? 비열한 사회라고 비판하는 그 늪 속에 세상과 동화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저 그렇게 그런 얄궂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신과 상대를 바라보라. 무한대의 절망과 회오가 느껴지는가?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고통과 곤고의 늪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 가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들에게 강도만난 자의 이웃 Neighbour가 되어야 하고, 진정한 위로자 Comforter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하고 주려 있는 이 시대의 상실자들에게 바칠 우리의 제물은 위로여야 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따뜻한 음성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환희의 무대로 초청하는 것이다.
II.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1. 위로란 무엇인가?
‘위로’란 헬라어의 위로(慰勞)와 권면을 뜻하는 헬라어의 여성명사 ‘παρακλησις(파라클레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의 동사형인 ‘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εω’로 ‘곁에’ 또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para'와 ’큰 소리로 부르다’ 또는 ‘초청하다’ ‘이름을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kaleō’가 합성된 것이다. 즉. 파라칼레오는 ‘곁으로 부르다’ 또는 ‘격려하고 힘을 북돋우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 격려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을 돕고 돌보며 간구하는 사역을 성령님께서 감당하고 계신다. 성령을 지칭하는 보혜사(Counselor 요 14:16, 26; 15:26; 16:7)는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변호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드러내는 단어이다. 권사도 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 παρακλητος parakletos comforter‘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도록 곁에 부름받은 자'로 ’우리 대신 하나님께 진지하게 요청하는‘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를 뜻한다.
예수님의 승천 후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가 그리스도인 안으로 임재하게 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가야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다 하시며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다(요 16:7). 보혜사 성령이 예수님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요 17:17)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친히 증거하시는 것이다 (요 14:26, 15:26). 진리의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알려 주신다(요 16:13). “요 12:44-45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보혜사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 대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각인의 이름을 부르며, 지속적으로 간청하고 계신 것이다. “롬 8:26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 주신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 그리고, 이와같이 위로하는 자는 ‘파라클레토스'로 성령의 다른 이름인 ‘보혜사’이다.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2. 누가 위로를 기대하는가?
이 시대의 사람들은 위로에 굶주려 있고, 하루에 35명꼴로 자살을 행하고 있다. 2009년 8월 30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8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에 따르면, 매일 35명씩 자살하고 1년간의 자살자수는 1만명을 넘고 있다. 20-30대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며, 80대의 자살률이 젊은이의 5배에 달한다고 한다.
위로받기를 갈망하는 이웃들이 허다하다. 그들은 소외되어 사는 것 자체를 힘겨워 한다. 소외된 자로 살아 가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그리고 삶에 거친 파도를 만난 자들, 복음의 고난에 참여한 자들은 절대적인 위로를 희구할 것이다.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일을 만나면 충격을 받기도 하고, 격렬한 고통에 몸부림을 치곤 한다. 인간은 너무도 연약하여, 마침내, 삶에 대한 의욕을 빼앗겨서 좌절하게 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서서 미소짓고, 인사하며, 대화로 칭찬하는 ‘미인대칭’의 삶을 몹시도 고대할 것이다. 환난의 파도가 크고 파고가 높을수록 더욱 더 큰 위로를 갈망할 것이다.
①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극한 슬픔에 대한 참된 위로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요한복음 11장에 이런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은 오라비 나라로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친척과 많은 이웃 사람들이 찾아 왔다. 예루살렘에서 약 15스타디온(약 1.9Km, 1스타디온 180m) 못 미치는 베다니 마을로 "많은 유대 사람들이 오빠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려고 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위로는 자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자매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심어주지 못하였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셔서 자신의 오라비를 죽지 않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현장에 도착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하고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한번씩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저희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더더욱 마르다는 “하지만 주여, 그가 저기 있은 지 4일이나 돼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한다. 완전히 절망한 것이다. 이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는가? 마지막 그들이 가진 한가닥 희망은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께서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그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제가 압니다.”라는 말에서 발견된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② 야곱의 슬픔
야곱의 인생역정 드라마는 크나큰 감동을 주곤한다. 그는 참으로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 130년을 보냈다. 그는 이삭과 리브가 부모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나,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그릇으로 탈취하고,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에 대한 축복마저 빼앗았다. 살의에 가득한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게 되었다. 외삼촌 라반은 품삯을 10번이나 변개시키며 야곱을 속였다. 20년 후 마침내 거부가 되어 그리던 고향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외삼촌 라반의 추격이 있었고, 에서가 400명의 사병과 함께 야곱을 치러 오기도 하였다. 그는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천사와 씨름하였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고 속이는 자로 천사에게 환도뼈를 맞아 절룩거렸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과 13명의 자녀들을 둔 야곱이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하며 사는 중, 딸 디나가 그 세겜성의 족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모욕과 시스온과 레위의 살인, 자신의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인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리는 등,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아픔은 그의 생애 내내 계속 되었다.
또한,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난산하자 ‘내 고통의 아들’이란 뜻의 ‘베노니’를 야곱은 라헬을 위로하고자 ‘내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냐민’이라 고쳐 불렀다. 그리고, 장자 르우벤이 라헬의 여종이자, 자신의 첩인 빌하와 통간하기도 하였다. 아들로부터 상처받고 절규한 야곱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And Jacob said to Pharaoh, "The years of my pilgrimage are a hundred and thirty. My years have been few and difficult, and they do not equal the years of the pilgrimage of my fathers.”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30년의 험악한 나그네 세월을 산 야곱에게 열두 아들의 축복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위대한 번성의 축복을 받았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족속의 기초를 놓았을 뿐 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유다를 통한 인류 구원의 여정은 힘있게 진행되고 있다.
③ 사렙다 과부의 슬픔
“왕상 17: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렇듯이 한끼 먹을 양식과 조금의 기름 밖에 없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렙다 과부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 “눅 4;25,2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기적이 임했다. “왕상 17:10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의 예언대로 혹독한 가뭄과 기근 속에서도 그들은 거뜬하게 살아 남았다.
“왕상 17:17,18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아들을 잃고만 사렙다 과부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분노와 죽음의 비통함,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얼마나 슬펐했을까? 그 깊이, 그 크기를 누가 감히 알 수 있을까? 사르밧 과부의 흐느낌과 외마디 절규 속에서 엘리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엘리야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 그 아이를 눕혀 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소서.”
엘리야가 울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니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 아이를 살려내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요 11:25,26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④ 예수님을 잃은 두 제자들의 슬픔과 절망
“눅 24:17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무척이나 신비스럽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예수님과의 설레이는 만남, 그것도 잠시 십자가 상에서 여느 사람과 같이 비참하게 죽어가신 예수님에 대한 더할 수 없은 연민과 절망. 그들은 더할 수 없는 슬픈 기색을 하고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으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다시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 보았더니 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보았으나 과연 그 여자들의 말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줄 알았는 데, 십자가에서 무참히 처형을 당하셨고, 장사한 지 사흘이나 되었고 여인들의 보고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믿었다. 예수님을 거저 출중한 능력을 갖고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어리석구나!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예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그들은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하고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들은 곧 그 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가보았더니 거기에 열한 제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도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는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 이렇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엎드려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우리 또한 두 제자처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 아니었던가?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 속에 장사지냄으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모든 기대와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엠마오로 향해 가는 두 제자의 슬픔은 이별과 절망, 연민의 슬픔이었고, 그들의 걸음은 석양을 향한 것이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불신과 절망의 슬픔으로 가려진 눈으로는 살아나신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볼 수가 없다. 두 제자들은 불신과 절망 가운데서 슬픈 빛을 띠고, 희망의 해돋이 ‘sunrise’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절망의 석양 ‘sunset’을 향해 좌절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갔다. 모든 슬픔들에는 눈물도 있고 감동도 있고 그 슬픔이 보석이 될 수도 있다. 석양이라는 인간의 절망 끝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해돋이 역사가 시작된다. 드디어, 예수님은 장사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참빛이 되고, 제자들을 빛 속으로 나아오도록 위로와 평안을 주셨으며,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의 해돋이가 되셨다.
⑤ 사도 바울의 고통과 하나님의 위로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가 “누구든지 바울 이야기를 쓰려면 그의 고난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듯이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 중 복음을 위해 바울만큼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어떤 고난을 당하였을까? 바울의 소명은 고난을 통한 복음 전파였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고린도의 거짓 사도들은(고후 11:13-15) 참된 사도들이라면 표적과 기사와 기적을 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바울은 연약함으로 인해 도리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역사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런 연유로 고난과 연약함을 자랑하는, 바울은 그의 생애 내내 믿음의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고후 10-13장).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고난 목록’을 나열한 간증집과도 같다. 그는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의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6:4-5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합니다만 나는 그 이상입니다. 나는 수고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감옥살이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고 밤낮 하루 꼬박을 바다에서 헤맨 적도 있습니다. 나는 수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 수고와 곤고와 종종 자지 못하는 것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때로 아무 먹을 것도 없는 것과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날마다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으니, 곧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타지 않겠습니까?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내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습니다.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 곧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는 내가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을 아십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관리가 나를 체포하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내가 창문으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난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고 믿고 있다(고후 1:4). 하나님은 고난 당한 바울을 위로하시고, 바울은 고난 속의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고난을 주시고, 그 고난을 통해 그를 강하게 단련시키셨다. 그는 십자가의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세우길 원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며, 날마다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았다. 이로 인해, 고난을 먼저 경험한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든든히 세울 수가 있었다(고후 1:3-7).
아무튼 바울은 이 모든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주님을 따랐다. 바울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셨다(고후 1:3).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위로하셔서(고후 1:4),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그와 같은 위로를 형제들과 서로 나누도록 하시는 분이셨다,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당하는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위로와 능력이 동반되고 있음을 알았다. 이 위로와 능력은 그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한 결과로 생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평안과 하나님의 위로는 그만큼 더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을 믿었기에,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위로가 더욱 넘친다고 고백했던 것이다(고후 1:3~6). 한마디로 바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 온전한 하늘 나라 사람이 될 완숙의 기회로 삼았다.
III. 맺는 말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의 부름을 입은 바울(행 9:3)은 고난을 옷입은 복음전파자였다. 그는 세상의 모든 영광을 벗어버리고, 세상의 모든 지식도 배설물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고자 결심하였고, 이를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여기며, 일평생 생명의 위협을 무릎쓴 이방인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어둡고 습기 찬 감옥에서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딤후 1:8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했다. 복음 때문에 사형언도를 받고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떻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유언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고난,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바울은 오늘 복음을 위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지만, 장차, 하나님 앞에 가면 영광과 생명의 면류관으로 바뀔 것을 알고 있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딤후 4:8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이다. 주님이 바로 정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은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다.”
“빌 2:17-23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배고픔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기록되기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인해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악마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능력도,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골 1:24,29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또한 ‘영화롭게 살아가도록 프러그램된 자들’(롬 8:30)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예정되고 선택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롬 8:28). 어떤 때는 극심한 고난과 고통과 슬픔의 파도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녀들을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심을 알아야 한다(롬 8:32).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환경과 상황을 초월해서 감사와 기쁨과 소망을 펼쳐 가야 한다. 아처럼,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인 고난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으며, 창과 칼의 위협 속에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졌기에 순교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시기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은사로 주신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궁극적인 위안과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속한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았고, 마지막까지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될 때, 더욱 더 큰 위로와 능력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다 해도(시 44:2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승리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신다. 위로의 말씀들이 환난을 당하고 슬퍼하는 심령 가운데 쏟아져 승리를 확신케하며, 생명의 샘물을 하수처럼 흘릴 것이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요1 5:5 세상을 이긴 사람이 누구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닌가?”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I have overcome the world.”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요1 5:4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고난 중에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영적 무지’인 것이다. 우리는 분명한 확신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광야와 같은 세상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수호천사(베드로의 천사 행 12:10-19)로 하여금 우리를 지키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 힘과 능력의 원천은 바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위로마저 거부하는 자도 있다. “창 37:35 그의 아들딸들이 다 와서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그는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아니다. 내가 슬피 울며 내 아들을 만나러 음부로 내려갈 것이다.” 그는 자기 아들을 위해 슬피 울었습니다.“ ”렘 31:15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마에서 한 소리가 들리니 애곡과 몹시 우는 소리다. 라헬이 그녀의 자식으로 인해 울고 있다. 그녀의 자식으로 인해 위로받기를 거절하니 이는 더 이상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시 77:2 내가 고난 가운데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밤새도록 지치지 않고 손을 뻗었고 내 영혼은 위로받기조차 거절했습니다.”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녀를 잃고 울고 있구나. 자녀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받기도 거절하는구나.”
이처럼 위로받기를 거절한 자들마저 위로하신다. 위로하시지 못할 자가 있겠으며,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 있을까? 예수님은 모든 환난과 고통, 슬픔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며 동시에 위로를 체험하며 살게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환난에서도 위로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 주시는 그 위로를 또한 많은 사람에게 체험시키고,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그 위로 안에서 살게 해야 할 사명자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과 재난 속에서도 ‘하늘의 아버지와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평강’을 마음껏 누리게 할 수 있다.
“고후 1:5-7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
“사 51:12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I, even I, am He who comforts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