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
에베소서 4:25-5:2
[본문 분석]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4:25-5:2)
1)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25)
2)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26-27)
3)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28)
4)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라(29)
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30-32)
6) 결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1-2)
[본문 강해]
지금 우리는 교회의 사회적인 사명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사회에서의 삶의 원칙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고 변화 받을 때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배웠다고 해서 그러한 삶을 자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옛 사람의 잔재들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말씀과 기도생활을 철저하게 하셔야 하고,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모임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본문은 이렇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4:25)."
"그런즉"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앞의 본문과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우리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는 말씀에서 이것은 일반적인 사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새로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1)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25)
2)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26-27): 분을 내지 말고
3)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28)
4)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라(29):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30-32)
6) 결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1-2)
버려야 할 것은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가져야 할 것은 새 사람의 모습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의 모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의 모습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모두 옛 사람의 모습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 사람의 모습만이 드러나서 서로를 세우고, 도전을 주고, 함께 협력하여 능력 있는 교회를 함께 세워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4:25).”
예수님은 인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
거짓이라는 것은 옛 사람의 대표적인 성품입니다. 거듭나기 이전에 우리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거짓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된 우리들은 이런 거짓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잠언 6장에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거짓된 혀”를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12:22).”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거짓이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시제에 따라서 한 번에 끝나는 행위가 있고,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할 행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거짓을 버린다는 동사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어야 할 행위를 가리킵니다.
거짓을 버린다는 것은 한 번에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거짓의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옳은 것은 끝까지 옳은 것이고,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닌 것입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정직하게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이웃이라는 말은 모든 이웃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지체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죄악을 거짓말로 간주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을 팔고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이것을 아무도 몰랐지만 성령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온 교회가 이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만큼 거짓은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소였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진실이라는 기초 위에 건설되어야 합니다. 교역자도 진실해야 하고, 장로님 집사님들도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서로가 믿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는 법입니다.
최근에 직장인들의 설문 조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어떤 것인 줄 혹시 아십니까? 그것은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직장인들이 아침에 출근해서 서로 인사를 나누지만 모두 거짓 인사였다는 말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그렇게 웃으면서 그것도 매일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것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의 주일 아침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정말 지체들의 삶이 궁금해서 인사를 나누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인사말인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헛된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우리는 한 마디를 하더라도 영혼을 세우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인터넷 세대들입니다. 인터넷의 특징은 익명성입니다. 자기의 신분도, 나이도, 심지어 이름까지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채팅을 하고, 메일을 주고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말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질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 생활에까지 침투해서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부담스러운 세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괴테의 작품 중에 “여우 라이네케”라는 작품이 인터넷에서 작품해설이 있기에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여우가 살아가는 세상은 술책과 간교함과 속임수와 거짓말 그리고 위선 등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그때 여우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여우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발한 거짓말과 엉뚱한 논리로 교묘하게 위기 상황을 모면합니다. 그러면서 괴테의 마지막 결론이 이렇습니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은 그럴지라도 교회는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 그런 거짓된 모습으로 나갈지라도 교회만큼은 믿을 수 있는 진실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하나님의 기관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음을 증거하고, 진실한 교제를 나누고, 신뢰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참된 교제와 진실한 나눔이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4:26-27).”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나 지속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옛 사람의 성품입니다.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에게서 화를 잘 내는 성품은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화가 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성질을 못 참고 화를 함부로 잘 내는 성품은 아직도 옛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분노를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도 “분을 내어도”라고 했습니다. 분을 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노입니까? 의로운 분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분노는 죄를 대적하기 위한 의로운 분노를 의미합니다. 사나운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화를 내는 그런 분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분노를 적절하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죄를 대적하기 위한 의로운 분노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오래 간직하고 있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변질되고 복잡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분을 내어도”와 “분을 품지 말라”에 똑 같이 분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처음에 가졌던 분노는 “분노하다. 분내다(호르기조)”로써 어떤 일에 자극을 받아서 흥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단어는 “적의, 원한(파롤기스모스)”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의로운 분노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미움과 원한의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침투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귀라는 놈입니다. 우리가 미움의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을 때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여유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단순한 분노에서 범죄하는 자리에까지 발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않도록 분노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도 분노를 품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요2:14). 어린 아이들을 주님 곁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 제자들을 향해 분히 여기셨습니다(막10:14). 하지만, 그분은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대부분 화를 내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되어진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교회 일을 좀 잘 해볼려고 하다가 서로 부딪혀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게 오래 지속되면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으나 나중에는 서로에게 원한의 감정을 품는 데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에 다녀도 서로 인사도 안하고, 하는 일마다 따지고 시비를 거는 관계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마귀에게 틈을 준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분노를 이용해서 공동체의 연합과 사랑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이 문제를 하루를 넘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 풀어야 합니다. 용서할 것은 빨리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은 빨리 받아 들여야 합니다. 어물어물 하는 사이에 마귀가 틈을 타서 관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날의 분노는 그 날에 푼다.”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이것을 급하게 처리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감정이 지나치지 않도록, 잠시 멈추어 생각하고, 기도하고, 신앙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는 미워해도, 형제는 미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제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그 분노의 감정을 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분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우리 자신을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그 형제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형제는 좀처럼 깨닫지도 못하고, 사과할 생각도 없고, 고칠 생각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에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76:10).”
우리에게 분노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주께서 금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순간에는 잘 참았는데 나중에 더 크게 터뜨리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분노가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이를 악물고 참기는 참는데, 나중에 터트리면 폭발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면 안됩니다.
끝까지 품어주고 사랑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모두 분노를 다스리고 절제하여 서로의 덕을 세우는 공동체가 되어 마귀에게 조금도 허점을 보이지 않는 능력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
“도적질하는 자”라는 말은 직업적인 도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도적질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도적질하는 것은 옛 사람의 대표적인 습관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은 전문적이며 큰 도둑들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까 파산 당한 건설회사 경리가 그 회사의 공금을 133억씩이나 횡령한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회사는 큰 어려움에 처해서 파산 선고를 받았는데, 그 회사 직원이 133억씩이나 자기만을 위해 가로챈 것입니다. 이게 바로 도적질입니다.
도적질은 세상을 쉽게 살려는 불성실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고 땀흘려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불성실한 마음으로 가로챈 돈은 가치없게 쓰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도 횡령한 공금 중 80억원 가량은 주식투자로, 나머지는 경마와 경륜 등에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귀중한 회사 자산을 그처럼 가치없게 탕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도적질을 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남들이 9시간 일하면, 우리는 10시간도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독이 올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재산을 모으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남천교회에 있을 때 어느 집사님의 자녀들이 결혼식을 했습니다.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3,000만원을 투자해서 호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권사님들과 여러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다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IMF 시대에 함께 어려움을 나누지는 못할망정 앞장서서 사치문화를 이끌어가서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더욱 부끄러운 모습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나 그 가족이 풍족히 살고, 안락하고 호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써서 재물을 모았으면 그 재물로 하나님 나라 건설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배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가르치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적질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평생에 도움이 안되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발 도움이 되는 분들이 되십시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에서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너 없으면 안된다. 너밖에 없다.”는 이런 인정받는 분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유익을 나눠주고,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많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정말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에 수고한다는 말은 “피곤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 이상으로 수고하고 땀흘리며 노력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직장인들은 정말 땀흘리며 노력해야 하고, 사업하시는 분들은 정말 열심히 연구하고 뛰어다녀야 합니다.
도적질한 불성실한 재물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재물입니다. 내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들의 섬김과 헌신이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라(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4:29).”
인간은 다 말에 실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말을 해놓고 만족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을 해놓고 후회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이미 뱉어놓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단순히 말의 실수를 말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더러운 말을 일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더러운 말이란 “썩은 말, 쓸데없는 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비방과 험담 뿐 아니라 음담패설과 같은 영혼을 병들게 만드는 말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 뿐 아니라 신앙을 나타냅니다. 모이기만 하면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고, 헐뜯는 사람들 또한 음란한 농담과 욕설과 같은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인격 뿐 아니라 신앙까지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3-4).”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음란한 농담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중상과 비방과 험담이 떠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입으로 영혼을 병들게 하고, 영혼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다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을 보니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다른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덕을 세우는 말을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말이 덕을 세우는 말입니까? 진실하고 정직한 말만 한다고 해서 덕이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옳은 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해서 다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옳은 말도 적절하게 사용되어지지 않으면 유익하기보다는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옳은 말을 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은혜가 되는 말을 했는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
때에 맞는 말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말해야 할 때가 맞아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과 때에 맞는 말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과 도전을 주는 건설적인 말이 많이 오고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통해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해 신앙이 세워지고, 삶이 풍성해지는 역사가 충만히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30-32)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본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원문은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앞의 본문과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 앞에 언급된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근심 걱정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언제 성령께서 근심하게 되십니까? 지금까지 언급된 옛 사람의 모습들로 돌아갈 때 성령께서는 근심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거짓을 행하고, 분을 참지 못하고, 도적질하거나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쌓고, 더러운 말을 통해 성도들을 해롭게 하는 일을 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실망하시고 근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처럼 옛 모습으로 돌아가 성령을 실망시키고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에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성령을 받아 내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때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시편 51편을 기록하면서 “주의 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서 떠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일단 들어오시면 마지막 날까지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더러운 인간 안에 계속 있자니 싫고, 떠나 버리자니 약속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이거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심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인해 근심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물로서 쓸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근심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31-32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1-32).”
쉽게 설명하자면 버릴 것은 버리고 행할 것은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31절입니다. “모든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 이것은 모두 옛 사람들이 가진 성품들의 목록입니다.
가) 버릴 것은 버리라
악독이라는 말은 원한을 풀지 않고 마음 속에 끝까지 품어서 결코 화해하지 않으려는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이런 관계가 되면 정말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대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원통한 마음이 들더라도 우리는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노함과 분냄이라는 말은 서로 동의어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노함이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급격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냄이라는 말은 미움의 감정이 계속 남아 있어서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도 말씀드렸듯이 그 날의 분노는 그 날에 풀어야 합니다. 계속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으면 안됩니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근심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떠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화가 난 사람이 자제하지 못하고 크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 사람들이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까? 대부분 자기 주장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그렇게 합니다. 교회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입니다. 내 생각과 방식이 하나님의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분의 뜻에 맡기고 겸손히 순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네 번째로 보시면 훼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원통함을 가지고 있다가, 점점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렇게 가다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훼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훼방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비방하고 인격을 손상시키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주로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감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비위가 상하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반대하고 나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감정적으로 비틀린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방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사건건 반대하고, 방해하고, 험담하고 그렇게 해서 일이 진행이 안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서 대표적으로 일어납니까? 국회에서 일어납니다. 도대체가 일이 진행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가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빨리 이런 관계를 청산하고 하나를 이뤄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십니다. 악의라는 말은 상대방이 선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갚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을 베푸는 원수라도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선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깨끗이 쓸어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김없이 깨끗이 쓸어서 동해 바닷가에 다 집어 던져야 합니다.
나) 행할 것은 행하라(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지금까지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제 32절 말씀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1) 인자하게 행하는 것 2) 불쌍히 여기는 것 3)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먼저 “서로 인자하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본래 인자하심이라는 성품은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17:2).” 이것은 히브리어로 헤세드로 “자비, 친절, 사랑, 인애”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언약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하심으로 대하셨다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미운 짓을 하고 대적하며 떠나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약 때문입니다. 이 언약 때문에 우리에게 끝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우리가 서로 인자하게 대하여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언약 안에 한 가족이 된 한 몸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언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수같은 행동을 해도 끝까지 품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서로 인자하게 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혐오감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이 등골이 오싹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쌀쌀맞게 대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자비와 친절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서로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은 동정심이 많은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위기에 처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병든 자들을 측은히 여기고, 시험에 든 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적으로 인정이 많은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어도 이런 마음을 가지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지체 중에 병든 자가 있어도 관심이 없습니다. 장기적으로 결석해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고를 당했거나 재정적인 위기를 당해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것입니다. 인정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은 서로에게 관심을 좀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좀 가지고 서로 인정을 베풀어서 모든 지체들이 건강하게 일어서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본래 실수가 많고, 결함이 많은 존재들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 쉬운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생깁니다.
이때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그 모임은 깨어질 수밖에 없고,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가 안되는데 어떻게 한 공동체 안에 계속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온전한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서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용서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용서해주셨습니까? 그분은 나의 죄를 완전하게 용서하셨고, 더 이상 그 죄를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만 용서하시고 나머지는 두고두고 씹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나의 죄를 완벽하게 제거해주셨습니다(시103:12).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도 이런 용서를 의미합니다. 지난번에 광주 사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광주사태를 일으킨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토론이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받아 주지만 그들의 죄는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까? 그것은 처벌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란 그들의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들도 받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습니까? 우리의 죄는 용서하셨는데 우리를 안받아 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용서해 주시는데 지옥으로 보내신다면 이게 무엇입니까? 이것은 용서가 아니라 처벌이며 심판입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서로의 잘못에 대해 용서할 뿐 아니라,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품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의 잘못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절대로 기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들 앞에서 다시는 거론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고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49번만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으로 용서한다면 공동체는 아름답게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한 가족임을 명심하고 서로 인자하게 대하며, 위기에 처한 자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도우며, 서로 주고받은 상처들을 용서하고 싸매어 준다면 어떻게 그 공동체가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거창교회에 이런 새 사람의 모습이 온전하게 세워져서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결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5:1).”
지금까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의 실제적인 적용을 말씀했습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버려야 할 옛 사람의 모습가 가져야 할 새 사람의 모습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삶의 영역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언급되지 아니한 다른 영역들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모방하면서 사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모방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까? 태풍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우리는 능력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모방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부분적으로 능력을 경험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방하며 따라야 할 모범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살아야 할 부분이 어떤 부분입니까? 그것은 본문 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2).”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능력은 모방할 수 없어도, 주님이 베푸셨던 사랑만큼은 본받아야 할 중요한 덕목인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똑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사랑 가운데서 행한다”는 동사는 계속 지속되어야 할 행동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본문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분의 인생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분은 전 인생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분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일 중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순간은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오직 인류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야 할 첫 번째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구질구질한 마굿간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이처럼 자기를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본받는 자의 첫 번째 사랑의 삶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니까 그분은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께서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제물이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 중요한 사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정말 중요한 사명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드렸습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런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과 주님의 나라 회복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랑으로 헌신하는 삶이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헌신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드린다는 말은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 이런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뤄야할 모습이 바로 이런 사랑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빌2:21).”고 한탄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일을 구하면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 큰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면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 능력있게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 헌신된 모습으로 세워져 주님을 위해 강하게 전진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우리는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모습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 새 사람은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없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새 사람들이 매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입니까?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모습을 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옛 사람의 모습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고,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행위들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은 공동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교회 중심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됨을 이루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도, 분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 것도, 도적질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는 것도,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는 것도 모두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우리가 입어할 덕목들입니다.
한국 성도들은 개인적인 신앙에는 적극적입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은혜받고, 혼자 축복받는 것에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은혜받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아직도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의 삶입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늘 성전에 모였고, 자기 물건을 조금도 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 몸 공동체가 되어 온전히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교회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이라면,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고침받고 버려야 합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이방인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성도들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의 핵심입니다.
우리 교회가 옛 모습을 온전히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서 모든 성도들이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